순수할 순(純)에 사랑 정(情), 순수한 사랑을 동경하던 그 시절 소녀들에게 순정 만화는 그야말로 지금의 유튜브였다. 1950년대, 일본과 한국에서 등장한 소녀 만화는 동그란 얼굴에 커다란 눈이라는 순정 만화의 전형적인 화풍으로 소녀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는다. 태초부터 여성의 취향을 저격한 이 장르는 사랑을 다룬 작품이 대부분이다.


  사랑을 소재로 한 작품의 필수 조건은 바로 감정이입이다. 그러나 바야흐로 삼포, 아니 N포세대. 2010년대를 살던 20대들은 경제·사회적 압박으로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했고 이러한 비관은 현재의 20대에게 대물림됐다. 한술 더 떠, ‘나락도 락(樂)’이라며 우울을 향유하는 그들에게 남의 사랑을 그린 순정 만화는 재미가 없다.

 

사랑? 웃기지 마!
  청년들의 관심사에서 연애는 밀린 지 오래다. 빅데이터 분석 서비스 ‘썸트렌드’에 따르면 ‘연애’ 키워드는 전년 동기간 대비 언급량이 68.48% 감소했다.(2023. 10. 13. 기준)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콘텐츠가 쏟아지는 유튜브만 보더라도 연애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재간이 없다. 무료로 누릴 수 있는 콘텐츠가 파도처럼 밀려오는 상황에서 굳이 연애에 돈과 시간을 할애할 청년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 발간한 2021년도 가족과 출산 조사에서도 배우자나 동거인이 없는 19-49세 미혼 1인 응답자 6,038명 가운데 ‘교제 상대가 있다’고 대답한 비율은 전체 28.5%에 불과했다.


  그러나 사실 순정 만화 추락세의 궁극적인 원인은 그 특징에 있다. 소녀 만화, 그리고 순정 만화. 완전히 성숙하지 않은 어린 여자아이를 뜻하는 ‘소녀’는 더 이상 여성들의 이상향이 아니다. 미소녀를 검색하면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선정적인 그림이 쏟아지는 대한민국에서, 소녀들은 소녀가 되길 거부한다. 이렇게 되면 ‘순정’은 말할 것도 없다. 어린 여자아이에게도 거두지 못하는 어긋난 욕망 앞에서 순수한 사랑이란 판타지에 가깝기 때문이다.

 

판도가 뒤바뀐 로맨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로맨스의 흔한 전개는 이러했다. 완벽한 남주인공과 조금은 모자란 여주인공, 보잘것없는 여주인공은 남주인공의 선택이 아니면 주목받을 수 없다. 일본의 순정 만화이자 대만, 한국 등 5개국에서 드라마화된 『꽃보다 남자』에서는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가 전개된다. 평범한 서민과 대재벌의 후계자, 굳이 성별을 밝히지 않아도 그들의 사랑 이야기는 눈에 훤히 보인다.


  그러나 최근 로맨스 장르에 ‘악녀’ 바람이 불었다. 웹소설·웹툰 플랫폼인 카카오페이지에서는 <악녀는 마리오네트>,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등의 로맨스 판타지 장르가 주력 상품이다. 해당 작품의 여주인공들은 로맨스 판타지 소설에 빙의돼 처절히 살아남는 역할을 맡아 비로소 신데렐라 콤플렉스에서 벗어났다. 주 독자층은 2030세대 여성으로, 로맨스 장르에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가 투영됐음을 알 수 있다.

 

여자도 사람입니다
  진정한 주인공이 됐으니 우리가 바꿔야 할 것은 이제 하나다. 대표적인 여성 착취의 산물, 바로 포르노다. 매슬로우의 욕구단계설에 따르면, 가장 강한 욕구인 생리적 욕구에는 성욕이 포함된다. 성별을 불문하고 거의 누구에게나 성욕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포르노는 대다수가 남성향으로,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장면이 영상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진다. 남자보다 여자의 몸을 더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은 물론, 간호사나 교사 등의 특정 직업을 성적으로 대상화해 나타내기도 한다.

 

ⓒ넷플릭스
ⓒ넷플릭스

  이에 여자들은 포르노 사이트 대신 넷플릭스를 찾는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브리저튼>은 19세기 영국, 사교계에서 만난 다프네와 헤이스팅스 공작의 계약 연애를 그린 드라마다. 성(性)에 무지했던 다프네는 공작과 함께하며 점차 쾌락을 배우는데, 성관계에 앞서 촘촘한 서사가 부여돼 있어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더불어 카메라는 공작의 혀와 근육을 느린 속도로 비춰 은근한 성적 암시를 던지고 있다.


  사랑 앞에서 그저 남자들의 대상에 그쳤던 여자들은 드디어 주체가 됐다. 남자들이 건네준 드레스와 구두를 벗어 던진 신데렐라는 이제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지 않는다. 서서히 피어오르는 불쾌가 아닌, 하나의 유흥으로서 사랑을 즐기려면 여성의 취향이 발휘될 때다.


최보영 기자 choiboyoung0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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