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봄, 기자가 되겠다는 말을 당당히 외치던 순간을 기억합니다. 철모르는 어린아이처럼요. 아마 중학생 때 했던 도서부, 고등학생 시절의 교지편집부 정도로 여긴 것 같습니다. 그렇게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 하나로 학생 기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가벼운 마음은 작은 일에도 크게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저의 결정이 틀렸다는 생각만 선명해졌습니다. 학보사 생활은 만만치 않은 일의 연속이었습니다. 이곳은 글쓰기 실력만큼 중요한 게 많았습니다. 대학 언론 기구로서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더불어 기사 끝에 들어가는 바이라인에 대한 책임감이 있어야 했고,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마음도 필요했습니다. 이 모든 게 부족한 탓에 늘 실수가 잦았습니다. 스스로가 필요하지 않은 존재같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단체를 위해선 이쯤에서 멈추는 게 마땅한 것 같았습니다.

  의지가 나풀거릴 때마다 학보사 기자분들의 도움을 받고 바로 세울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함께 학보사실에서 공강 시간을 버티고 조판을 하고 회의를 할 수 있어서 진심으로 행복했습니다. 특히 저는 한겨울에 학보사실에서 기자분들과 복닥거리며 나누는 이야기가 좋았습니다. 본관 2층 끄트머리에 좁게 자리한 방은 사계절 내내 냉골이었지만, 그래서 온기를 더 잘 느낄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함께’라는 즐거움을 깨우칠 수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힘은 정말 단단하고 막대해 웬만한 일엔 끄떡하지 않더군요. 아무리 과중한 업무더라도 다 해낼 수 있었습니다. 수습기자 시절 민속놀이 기획 기사를 쓰기 위해 기자분들과 여의도에서 연을 날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바람이 약했던 탓인지 허공에 뜬 연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자꾸 추락했지만, 재밌는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이 무렵부터 막연히 생각했던 것도 같습니다. 같이 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해도 웃으며 털어낼 수 있다는, 그런 최면 아닌 최면을 말입니다.

  한 3년 전에 버스를 기다리다 폐지가 수북한 손수레를 끄는 할머니 한 분을 봤습니다. 분명 빨간불이었는데 할머니께서는 건널목 중간 지점을 위태롭게 건너고 계셨습니다. 거동이 불편해 제시간 안에 다 건너지 못한 것으로 짐작합니다. 차들은 경적을 울리며 그를 쏙쏙 피해 달렸고, 행인들은 할머니를 그저 바라만 볼 뿐 선뜻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때 한 피자 배달원이 오토바이에서 내려 할머니를 먼저 모신 뒤, 손수레를 인도로 힘껏 밀고는 사라졌습니다. 몇 분 되지 않는 짧은 순간이었으나 상황이 생생히 그려집니다. 이 일화는 기사를 작성할 때 문득문득 떠올랐습니다. 글을 쓰는 제 모습이 마치 손수레를 미는 행인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퇴임사를 적으며 스스로 되묻기도 했습니다. 제가 그 건널목 앞에 서 있었다면 손수레를 밀 수 있었을까요. 오직 초록불을 기다리며 할머니를 관망하고 있진 않았을까요. 시간이 꽤 흘렀으나 3년 전과 다름없이 손수레를 밀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일화는 어떤 말을 듣고 글을 읽는 것보다 소중한 경험이 돼 주었습니다. 강한 자는 약한 자를 돕고, 다수가 소수를 지켜야 한다는 이치를 두 눈으로 볼 수 있었으니까요. 또,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하단 걸 알았습니다. 피자 배달원은 아마 배달에 늦어서 꾸지람을 들을 용기, 자신이 차에 치일 용기, 많은 시선을 견딜 용기를 내어 생명을 구한 것이겠지요. 이렇듯 용기는 늘 필요하고, 작고 적은 것을 지키기 위해선 더 많이 요구됩니다. 나이, 성별, 인종을 나아가 지금도 도로 어딘가를 서성이고 있을 모든 것을 아우르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살면서 누군가에게 피자 배달원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을까요? 못해도 따끈한 피자쯤은 되고 싶습니다. ‘아직 세상엔 따듯한 것들이 너무 많잖니’ 하고 달래주는 존재요. 그리고 따듯한 것 중 하나 정도 될 수 있는 글을 쓰겠습니다.

송영은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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