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임을 앞두고, 기자 생활의 시작을 곰곰이 되짚어 봤습니다. 아직 세상 물정 모르던 초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더군요. 나서기를 좋아하는 제게 담임선생님께서는 한 가지 활동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당시 정부에서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모집했던 어린이 기자단이었습니다. 그때부터였을까요. 저는 나름대로 소박한 기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한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해드리려 합니다. 제 인생 첫 취재원은 경찰관이었습니다. 아빠의 손을 잡고, 떨리는 마음으로 경찰서 문을 열었습니다. 나이가 지긋하신 경찰관 선생님께서 저를 맞이하셨습니다. 뜻밖의 손님이 당황스러우셨겠지요. 게다가 어린이 기자라며 질문을 쏟아내는 제 모습이 조금은 우스꽝스러울지도 몰랐겠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전문 인터뷰에 응하듯 좋은 답변들을 전해주셨습니다. 당시의 저는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던 게 문제였지만요. 경찰은 무슨 일을 하는 직업이냐는 제 질문에 그분은 국민의 안녕을 보장하는 일이라 하셨습니다. 11살의 제게 ‘안녕’은 인사였습니다. 그때 처음 ‘안녕’에 안전하고 태평하다는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조금은 미리 배운 공부였습니다.

  10년이 지나고 맞이한 새로운 기자 생활, 배움이 무색하게도 그리 ‘안녕’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수습기자 시절에는 컨택 전화 하나에도 대본을 길게 써야 할 만큼 미숙하고 어렸습니다. 정기자 시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시청 앞 도로를 3시간 동안 걸었던 순간도, 당일치기 광주 취재를 다녀왔던 순간도 매번 안녕하지 못했습니다. 신문 발행 후에는 더욱 긴장했습니다. 취재원의 전화로부터 들려오는 예상치 못한 문장들에 제 숨이 턱하고 막히지 않도록, 전화를 받기 전 한 번의 심호흡을 거치는 습관도 생겼습니다.

  그래서인지 편집장이라는 직책이 주어졌을 때 성취감이나 자부심보다는 걱정과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학보사라는 단체의 엄중함을 더없이 알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학보사는 단순 학생 단체가 아닙니다. 자칫했다가는 인터뷰이에게 고소를 당하기도 합니다. 언론중재위원회에 회부되는 일도 있습니다. 일을 하면 할수록 ‘보통 일이 아니다’ 싶었습니다. 그런 단체의 대표를 맡는 일은 정말로 막중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또 마무리 짓습니다. ‘잘한 1년’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의미 있는 1년’임은 확신합니다. 올 한해에는 여러 시도가 있었습니다. 사회·여성 면에서 처음으로 기획연재를 시작했습니다. 고립·은둔 청년에 대한 깊이 있는 이야기를 3번에 걸쳐 담아냈습니다. 무턱대고 시작하게 된 연재에도 좋은 기사를 펴낸 기자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잊지 말아야 할 사고도 있었습니다. 사고 직후 밤을 새우며 속보를 써냈습니다. 바로 찾아온 방학도 그냥 보내서는 안 됐습니다. 한 달간 특집 팀을 꾸려 그날의 일이 영원히 기록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어려움이 많았음에도 당시 열심히 취재를 진행해 준 기자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하지만 사실,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하고 싶은 대상은 따로 있습니다. 올 한해 동덕여대학보와 함께해 주신 독자 여러분입니다. 항상 감사한 마음을 품고 있지만 제대로 표현할 기회가 없었던 것 같네요. 매번 기사로 물은 저희의 질문에 응답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 응답을 위해 언제나 최선을 다했습니다. 부족함 많고 실수투성이였지만, 글에 담긴 기자들의 땀방울은 그 무엇보다 진했습니다.

  수없이 달려왔던 2년 반의 시간. 이제는 그곳에 마침표를 찍을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마무리를 지으려니 올해 들어 부장단과 많이 나눴던 말이 생각납니다. “그래도 어떻게 끝이 났네.” 어려움이 없었던 호가 없었습니다. 마지막까지도 수많은 밤을 새워야 했습니다. 깨끗한 마무리는 아닌 것 같아 조금은 아쉽습니다. 그렇지만 올해의 마지막호까지, 어떻게 끝내봅니다.

김한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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