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부터 여성은 자기 몸에 대한 사회적 규제를 탈피하고자 ‘My Body, My Rules’를 외쳐왔다. 그러나 여전히 여성의 몸은 부위별로 낱낱이 평가받고 있다. 가슴과 골반 등 성별에 따른 신체적 차이에서 기인한 차별은 여성성을 과도하게 부각하고, 이를 포르노로 소비한다. 반면, 체온을 조절하고 생식기를 보호하기 위한 체모는 모든 사람의 신체 일부임에도 여성의 몸에서만 불결함의 표상이 된다. 이렇듯 수많은 잣대에 의해 여성의 다양한 체형은 정형화돼 가고 있다. 우리는 과연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을까.

김다연 기자 redbona@naver.com
김효주 기자 hyoju0208@naver.com

이나윤 수습기자 dmhmm5@naver.com
이보리 수습기자 dlqhfl68@naver.com

 

 

 

가슴, 그 모순에 대해

  여성의 몸에는 많은 사회적 규제와 편견이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브래지어 착용 유무는 한국 사회에서 끊이지 않는 이슈 중 하나다. 한국에서 여성 연예인이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상태로 대중 앞에 선다면, 그날의 저녁 뉴스는 ‘가슴’으로 가득 찬다. 일반인도 마찬가지다. 길을 지 나다 ‘노브라’인 여성을 발견하면,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리거나 손가락질하기 일쑤다.

  여성의 가슴에 주어진 규제는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입술의 생기를 위해 주로 사용 되는 틴트. 이는 사실 유두를 장밋빛으로 물들이기 위한 ‘유두 착색제’에서 출발했다. 한 스트립 댄서의 부탁으로 제작된 이것이 큰 인기를 끌자, 입술과 볼까지로 용도를 확대해 판매 한 것이다. 일반 틴트보다 착색이 오래가는 유두용 틴트는 최근까지도 출시되고 있다.

  한편, 최근 여성 가슴에 대한 편견을 깨트린 제품이 등장했다. 바로 지난달 31일, 킴 카다 시안의 속옷 브랜드 ‘스킴스(SKIMS)’에서 출시한 ‘니플 브라’다. 니플 브라는 유두를 가 리는 기존의 브래지어와 달리, 유두를 되레 부각하는 디자인으로 만들어졌다. 이는 마치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하면서도 가슴을 보정하는 효과를 준다. 제품에 대한 소비자들의 반응은 상반됐다. “노브라가 공공연해지는 계기”라 는 긍정적 의견도 있었지만, “기괴하다”, “가리진 않더라도 예쁘긴 해야 하냐”는 부 정적 견해가 대다수였다.

  여성의 가슴은 사회적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책 『가슴이야기』의 저자 플로렌스 윌리엄스는 “몇몇 페미니스트 인류학자들 앞에서 젖가슴의 존재 이유가 남성이라고 말했다가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 골반 모형으로 머리를 얻어맞을 것” 이라고 말했다. 가슴의 일차적 기능은 모유 수유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여성의 가슴은 성적 기관과 꾸밈의 대상이 됐다. 이것이 여성의 자기만족인지, 아니면 여러 규제와 편견을 의식한 결과인지는 알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제는 여 성의 가슴에도 진정한 자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생하는 털, "지우지 마세요"

  지난 9월, 국내 댄스 서바이벌 프로그램 에서 ‘털’ 논란이 일었다. 출연 자인 댄서 오드리가 겨드랑이털을 드러낸 채 춤을 춰 이에 몇몇 시청자들이 불편함을 제기한 것이다. 한 시청자는 털을 기르는 것은 자유지만 “방송에서까지 보여줄 필요가 있냐”며 의 문을 표했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털은 불편한 존재 중 하나다. 사회는 ‘털 없이 매끈한 피부’를 미적 기준으로 부여했고, 대중들 역시 이를 이상적 가치로 삼았다. 그로부터 여성들은 △레이저 △면도기 △왁싱 등 갖은 방법으로 털을 없애기 시작했다. 물론 털의 노출을 지양하는 태 도가 국내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한국에도 보편화된 음모 제거 시술인 브라질리언 왁싱 은 오늘날 서양 여성들에겐 필수 과정이 됐다. 심지어는 이성에게 성적 매력을 유발하기 위 한 목적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한편, 미국에선 털에 대한 인식을 극복하려는 움직임이 보였다. 바로 있는 그대로 의 모습을 사랑하자는 보디 포지티브(Body Positive) 운동이다. 해당 운동을 전개하 는 이들은 털이 신체 일부이며, 그런 털을 없애는 게 오히려 기이하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세계적 팝스타 마돈나의 딸은 보디 포지티브를 지지하고자 패션쇼에서 겨 드랑이털을 노출했다. 이러한 개인에 의한 실천은 점차 확대돼 결국 미국 내 기업 으로까지 번졌다. 미국의 면도기 제조업체 ‘빌리’는 제모하지 않은 여성을 광고에 등장시켰고, ‘애플’은 처음으로 수염 난 여성의 이모티콘을 출시하기도 했다.

  우리는 남성의 덥수룩한 수염을 하나의 스타일로 여겨왔다. 성별에 상관없이 털 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여성의 경우는 최근에서야 그 자체로 존중받기 시작했다. 물론 한국에는 여전히 외모지상주의가 팽배해 하루아침에 제모를 그만두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나 이조차도 인체의 순리에 의한 ‘자연스러움’을 뛰어 넘을 순 없다.

 


누구를 위한 실루엣인가

  사람들은 유독 여성의 ‘실루엣’에 집착한다. 여자 아이돌의 공연 영상 댓글창에는 “골반 이 넓다”, “허리가 잘록하다” 등 스스럼없이 여성들의 몸을 평가한 내용들이 줄곧 달린다. 이런 대중의 평가는 곧 신체적 기준으로 작용하고, 그 기준에 맞춰 여성들은 자신의 몸을 바꾸거나 보정 어플로 몸선을 과하게 다듬는다.

  이처럼 사회가 여성의 골반과 허리에 유독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남성의 원 초적인 자아실현적 욕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원시 시대부터 남성은 골반이 넓은 여성이 건강한 자손을 낳는다는 것을 학습했다. 또한 중세 시대에 들어서는 여성의 잘록한 허리가 가정의 부유함과 관능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이후 여성들의 미적 기준이 되는 지표로도 작용했다. 해당 관습은 현재까지도 이어져 와 여성의 골반이나 허리를 성적인 매력 의 중심으로 인식하게 한다.

  종족 번식이라는 원시적 근거에서부터 시작해 끝내 보편적 외적 기준으로 자리 잡 은 여성의 실루엣. 여성들은 이같은 사회 기조에 맞춰 자신의 몸을 변형시키기에 이른 다. 일시적이지만 빠른 회복 효과를 위해 성형외과에서 ‘필러 시술’을 받는 것은 기본, 이후 영구적 효과를 위해 ‘골반 내 보형물 삽입술’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이 는 여성의 몸에 치명적인 부작용을 유발한다. 몸속에서 필러가 흘러내려 배꼽에서 필러 용액이 흘러나오거나, 심할 경우 국소 패혈증으로 피부 조직이 괴사해 결국 하지를 절단하기에 이른다.

  여성의 실루엣에 집착하는 사회적 기조를 만든 대중들과 이에 순응하고 본인의 고유한 신체를 저버리는 여성. 두 주체는 ‘사회적 분위기’라는 명목하에 자기비판 없이 무조건 적으로 수용만 하기 바쁘다. 그러나 여성의 실루엣은 타자에 의해 평가될 수 있는 요소가 아니다. 우리는 각자 고유 실루엣을 가졌으며, 이는 어떠한 표준에도 얽매이지 않는 아름다움의 표현이다.


 

전도된 '여성', 지워지는 나

  여자아이가 초경을 하면 “진짜 여자가 되는 거야”라며 축하받는다. 신기하게도 우리는 정혈이 시작되면서 비로소 ‘여자’가 된다. 여성 건강 앱 ‘헤이문’에서 조사한 여성의 초경 나이는 12.9세. 그 전까지 우리는 여성의 존재를 부정당하는 걸까.

  정혈 기간에도 여성을 향한 편협한 태도는 계속된다. 2020년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는 여성 직원이 생리 휴가를 내자, 입증 자료를 요구하는 어이없는 상황이 펼쳐졌다. 과거부터 비슷한 일이 잇따르는 현실에서 여성은 본인의 건강 상태를 남성에게 꾸준히 증명해 야 했다. 핑계나 꾀병으로 여겨지진 않을지 스스로 검열하고, 자신의 건강권을 제대로 보 장받는 것은 기대조차 하지 않은 채 말이다.

  여성에 대한 사회의 대수롭지 않은 시선은 출산 문제로도 이어진다. 여성 질환을 앓았던 경험에 빗대어 전시 《티티루스의 숲》을 기획했던 작가 레나는 두 차례의 진료를 받으며 겪었던 혼란을 기자에게 설명했다. 포궁을 적출해야 하지만 “아직 독신이니 상황을 지켜보 자”고 했던 담당 의사와 “출산 의지가 없다면 포궁은 그저 하나의 장기에 불과하다”는 또 다 른 의사. 이 상반된 진료는 여성을 마치 새 생명을 잉태하는 포장지처럼 여기고, 한 인격체는 외면하는 세태를 반증한다.

  이러한 현실은 여성에게 큰 파동을 일으킨다. 여성으로 살아간다면 포궁을 단순 장기 취급하기엔 한계가 있다. 질 건강을 위해 꽉 끼는 바지를 피하고 ‘아랫목’을 따뜻하게 하는 행위는 정말 ‘나’를 위한 것일까. ‘여자’로서의 역할을 책임지는 포궁은 어쩌면 그것을 빌미로 모든 여성의 상전 노릇을 해왔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임신과 출산의 영역에 속박된 여성은 자신 을 타자화하는 남성주의 사고에 몰입해 끊임없이 본인을 의심하고 옥죌 수밖에 없다.

  현 사회에서 젊은 여성의 몸은 임신과 출산에 한해서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아기를 낳을 신성한 몸, 그러나 세상의 부조리를 일깨운 여성들은 그런 숭고한 평가조차도 매우 불쾌하다. 우리는 모든 이 해관계를 다 던져버린 채 그저 ‘나’대로 존재하고 싶을 뿐이다.

 

  여성들은 이미 일상에서 각자의 몸에 대한 시선을 체감하고 있다. 그렇기에 자기 몸에 자긍심을 북돋우면서도, 어느 날은 이를 못마땅히 여겨 한없이 거울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이런 자신이 세상의 숱한 평가에 반기를 들지 못하고 순응하는 것 같아 죄책감을 느끼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에게 전하고 싶다, ‘그렇게 나아가는 것’이라고. 더 이상 그 죄책감을 두려워하지 마라. 당신의 옆에는 당신과 비슷 한 수많은 여성이 함께 걷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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