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한적한 시골 길에 노인 한 분이 건널목의 신호를 기다리며 서 있다. 그 옆에는 꼬마들 몇 명이 같이 서 있는데, 지나가는 자동차는 보이지 않은 채 이들도 그냥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윽고 신호가 바뀌고 아이들은 노인을 모시고 차가 없는 건널목을 손을 들고 건넌다.......’
어제오늘의 우리 사회질서를 생각하며 간절히 그려보는 희망적 자화상이다. 물론 정직과 공의가 담보되지 않는 질서는 자칫 낙오와 바보짓으로 치부될 수 있다.
 
공원의 하수구에 수북이 쌓인 담배꽁초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러나 작은 질서가 모여 큰 강물이 되고, 주변 농토를 비옥하게 하는 한편, 온갖 쓰레기를 씻어 내리고 정화 시켜가는 이치를 주목하자. 사회 내부의 이런 작은 질서들이 끊임없는 핵분열을 거듭하여, 큰 사회질서의 기틀을 다져가는 이치를 곱씹어본다.
 
질서가 정착돼 그 깊이와 폭을 더 해가면 용서와 양보의 미덕이 잉태되고, 다시 나눔과 봉사와 사랑으로 절정을 이룬다. 받은 사랑의 대가는 ‘기쁨’을 돌려주는 것이다. 사랑은 나눌수록 커지고 슬픔은 나눌수록 작아진다고 했다. 4+4 < 4x4 . ‘합’과 ‘승’의 원리도 이와 같다. 자원봉사자가 많은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우리의 사랑이 신의 영역으로까지 상달, 승화되어 우리를 감읍게 하는 은혜요 응답이라고 믿고 싶다.
 
알렉산더 대왕이 노예선을 방문한 일화이다. 많은 노예가 한결같이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아우성치는 중에 한쪽 구석에 머리를 숙이고 앉아있는 한 노예를 발견하고는 알렉산더가 물었다. 너는 어떤 연유로 여기 왔느냐고. 그 노예가 대답하기를 자신은 지은 죄가 커 죽어 마땅한 놈이라고 고백하자, 알렉산더는 의인들 속에 죄인이 섞여 있으면 되겠느냐고 그를 불러내어 참회의 눈물을 닦아주며 방면했다 한다.
 
한때의 잘못으로 국법을 어겼어도 진정으로 뉘우치고 사죄하면 벌을 면하고 재생을 돕는 사회제도가 질서의 보완장치로 접목되면서 관용과 사랑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 그러나 한편, 사회정의의 구현과 쟁취를 빙자하여 점점 더 난폭해지는 거리의 시위행태, 공직자의 교묘하고 악의적인 탈선, 민의의 전당에서 부끄러운 줄 모르고 자행되는 국기 문란 행위 등은 관용하기엔 너무 멀리 와 버렸다는 생각이다.
질서는 일회용이 아니다. 선거 때 남발하는 공약 같은 것은 뻔히 보이는 허구를 짜깁기해서 유권자의 시선에 착시현상을 일으키게 하는 술책이다. 무질서의 서열로는 맨 윗자리에 해당하는 사술이다. 그러나 사회를 이렇게 비관적이거나 부정적으로 볼 일만은 아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우리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어야 한다고 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어제를 오늘의 거울에다 비춰보며 더 큰 감사와 감격으로 내일을 그려가자. 하늘은 스스로 돕고 품는 자의 편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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