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리나(1971)』- 잉에보르크 바흐만/민음사(2010) -

 

   근대가 시작된 15세기 이래 문필과 창작 활동을 한 여성이 몇몇 알려졌지만, 그들은 19세기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창의력을 제약하는 사회 구조 속에서 살아왔다. 따라서 기존의 여류 문학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순종과 모성애가 강조되는 흐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여성 삶의 질의 문제를 인식하고 정체성을 모색하는 여성 문학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여류 문학은 모든 여성의 문학을 포함하는 반면, 여성 문학은 여성의 문제를 재조명하고 정체성을 찾는다는 점에서 여류 문학과는 성격이 다르다.  

   독일의 여성 문학은 1970-80년대에 유럽에서 일어난 여성해방운동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이로 인해 1970년 이후에 독일 여성문학은 60년대의 여류 문학과는 다른 새로운 여성 문학이라는 의미를 갖게 됐다. 말리나 역시 이에 해당한다.

『말리나』는 근현대 여성의 한계, 고독, 불안정한 모습을 독특한 필체로 표현한 여성작가 잉에보르크 바흐만의 대표작이다. 또한, 이 책은 바흐만이 기획한 연작소설 『죽음의 방식』 중 제1부에 해당하며 총 3장으로 구성됐다.

   특히 바흐만은 언어철학과 실존철학을 공부하며 그 사상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여성작가로서 언어와 실존은 더욱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또 그녀의 작품은 여성 안에 존재하는 남성적 자아, 언어를 통한 소통의 불완전함에 대한 통찰을 드러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 ‘나’는 이름도, 나이도 없다. 이는 정체성이 없고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여성의 모습을 나타냈다. ‘이반과 함께 행복하게’라는 제목을 가진 1장은 빈(Wien)에 사는 작가인 ‘나’가 등장한다. ‘나’는 삶의 의미를 오직 ‘이반’이라는 남자와의 관계에서 찾는다. 그녀에게 사랑은 종교가 되고 자아의 내던짐으로 나타난다. 이반은 ‘나’에게 끌리지만, 주인공처럼 사랑에 모든 것을 바치지 않는다. 그는 단지 ‘나’를 유희의 대상, 육체적 욕구를 채워주는 존재로 생각한다. 또한, 이반은 ‘나’와 같이 창작 의지가 강하고 남다른 언어력을 가진 주인공을 ‘멍청한 아가씨’라 비하한다. 이런 남성 우월성의 강조는 나아가 여성의 역사에서 남녀가 대등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준다.

   남성중심사회의 모습은 2장의 ‘아버지’라는 인물을 통해 심화된다. ‘제3의 남자’라는 제목은 주인공의 아버지를 상징한다. 35개의 악몽 속 아버지는 ‘꿈속 상황마다 다른 직업’으로 등장해 아내와 애인 그리고 딸까지 죽이려 한다. ‘나’는 아버지의 폭력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지만, 아버지의 폭력에 의해서 실패한다. 꿈에서 주인공은 여성에게 강제로 요구되는 가치를 수용당하며 저항할 목소리도 내지 못한다.

   특히, 2장에서 ‘나’의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의 애인 멜라니는 가부장 사회에 존재했던 두 가지 여성을 나타낸다. 어머니는 아이를 낳고 키우는 순종적인 이미지로 가정을 지키기 위해 가부장제에 복종한다. 어머니는 결국 아버지의 사상에 지배당하며 폭력에서 구조를 요청하는 딸의 눈빛마저 무시하는 지경에 이른다. 멜라니는 관능적이고 성적인 모습을 지닌 존재다. 가부장제에 빌붙어 남성을 이용하는 인물로 당시 남성에게 공공연하게 허용됐던 매춘부를 상징한다.   

   1, 2장에서 가끔 등장하며 ‘나’와 함께 생활하는 인물인 말리나는 3장에서 본격적으로 존재감을 나타낸다. 3장은 ‘마지막 사건들에 대해서’라는 제목으로 말리나와 나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과 함께 사는 남자 말리나는 이반을 향한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무능력해진 그녀를 대신해 생활을 이어나간다. 그는 여러 면에서 부족한 주인공의 유일한 의지의 대상이면서도 미스터리한 존재다. 이반과 헤어진 후 ‘나’는 말리나에게 더욱 의존하게 되고 말리나는 어느새 무서운 지배자가 돼 그녀를 공격한다.

   두 남녀는 분리돼 등장하지만, 실상 말리나와 ‘나’는 일체이다. ‘나’는 불안한 정서를 가진 ‘여성 자아(Anima)’이고 말리나는 그녀에게 질서를 촉구하며 이성적인 사고를 갖고 판단하는 불변적 ‘남성 자아(Animus)’라고 할 수 있다. 3장에서 말리나는 ‘나’를 벽에 가두고 그녀의 물건들을 부숴버린다. 이는 주인공 안에서 아니무스(Animus)의 이름으로 아니마(Anima)를 무시하고 끝내 죽인 것을 뜻하며 가부장제에 세뇌당하고 길들여진 그 당시 여성의 모습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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