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과 <동주>, 일제강점기의 그들과 지금의 청춘들 그들은 과연 무슨 잘못을 저질렀나. 그저 가족과 가난한 밥상이라도 나누는 것이 소원이었을 그 소녀들은 이유도 모른 채 지옥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평생 지워지지 않을 끔찍한 시간을 겪은 후, 마치 다된 소모품을 버리듯 아무도 모르는 구덩이에 사살돼 버려졌다. 한참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그 구덩이에서 스러져간 무고한 소녀들의 그 넋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그들을 위한 진혼곡, 그것이 ‘위안부’ 피해자의 실상을 다룬 영화 <귀향>이다.
  그때의 젊은 청춘들은 왜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를 이토록 아파했고, 결국 꽃다운 나이에 꺾어지게 됐을까. 故 윤동주 시인이 했던 건 단지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려던 것이었다. 하지만 부끄러운 현실은 그가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부끄러운 현실을 만든 건 다름 아닌 어른들이 아닌가. 저항하지 않고 심지어 전향해버린 어른들의 부끄러운 선택이 있어, 청년들은 아픈 삶을 살아야 했다. 영화 <동주>는 당대의 청춘에 대한 참회다. 
  <귀향>과 <동주>, 닮은 구석이 많은 영화다. 둘 다 일제강점기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 그렇고 당대에 스러져간 꽃다운 이들의 이야기라는 점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영화들이 각각 3백만과 1백만 관객을 넘어서는 기적 같은 일을 만들었다는 기분 좋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의미심장한 공통점은 이 두 영화 모두 지금의 젊은 층에게 깊은 호응을 얻고 있다는 점이다. CGV의 조사에 따르면, 영화를 본 관객 중 <귀향>의 27.3%, <동주>의 31.3%가 20대 여성 관객이었다고 한다. 어찌 보면 일제강점기라는 한참 이전 시대의 이야기에 이토록 지금의 청춘들이 열띤 반응을 보인 건 이례적이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결과를 가져오게 한 것일까.
 그 중심에 서 있는 키워드가 다름 아닌 ‘청춘’이다. 시대는 달라도 그 아픔을 공감한 이들이 거기에 있었다. 영화 속 소년, 소녀의 이야기는 자신들이 잘못한 것도 없는 현실에서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때로는 꺾어져 절망하고 있는 현대의 청춘들에게 어떤 동병상련의 공감대를 느끼게 한다. 그저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기를 바라지만 생존의 문제 앞에 서서 늘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지금의 청년에게 <동주>가 보여주는 청춘의 선택은 먹먹한 느낌을 주었을 것이 틀림없다.
 물론 일제강점기라는 상황과 지금의 현실을 똑같은 동일 선상에 놓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 두 시기가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혹독한 현실 앞에 청춘들을 희생시켰다는 점만은 결코 다르다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결코 쉽지 않은 현실이지만 기적을 이뤄낸 이 작은 두 영화처럼, 우리네 청춘들이 꺾어지지 않고 피어날 수 있는 많은 기회가 주어지기를 바란다.

정덕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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