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전자기기로 읽는 디지털 시대인 요즘 서점가에는 때아닌 아날로그 열풍이 불고 있다. 어렸을 적 한 번쯤 해봤을 색칠공부는 컬러링북이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했다. 그리고 ‘필사’ 또한 라이팅북으로 현대인의 새로운 취미가 됐다. 이에 필사 책은 서점에서 ‘이달의 필사 추천’이라는 안내 표지판과 함께 여러 섹션을 차지하고 있다. 

  

   얼마 전 서점에 들렀던 기자도 필사 책을 사서 집으로 향했다. 책을 본 부모님은 “학교에서 과제로 내준 책이니?”라고 물었고, 이에 본인은 요즘 대중 사이에서 필사가 인기를 끌고 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이처럼 부모님 혹은 그 이전 세대의 기억 속에 필사는 연습장에 빽빽하게 옮기던 국어 시간 숙제로 남아있다. 또한, 시인, 작가, 언론인 등을 지망하는 친구가 주로 문장력을 기르기 위한 목적으로 필사를 이용했다고 기억한다. 그러나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이용한 빠른 정보를 추구하는 현대 사회의 젊은 세대에게 필사는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문장 하나하나에 집중하다

   회사원 K씨(24)는 지난해부터 필사 책을 꾸준히 구매해서 쓰고 있다. 그녀는 기존에 필사를 좋아하거나 손글씨에 흥미를 보였던 것은 아니었다. 지난해 대형 서점을 방문했던 그녀는 익숙한 제목의 문학책 한 권을 집었고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지 않은 채 바로 구매했다. 회사 일로 바쁜 일상을 보내고 며칠이 지나서야 사 왔던 책을 펼쳤다. 책의 한쪽 페이지가 텅 비어있는 것을 본 그녀는 뭔가 잘못됐음을 눈치챘다. 그리고 책을 천천히 살펴본 뒤에야 ‘필사’를 위한 책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한 뒤 펜을 집어 들었다. 오랜만의 글쓰기가 낯선 것도 잠시, 글을 쓸수록 문장을 하나하나 자세하게 읽게 됐고 전체적인 내용 또한 수월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이후 그녀는 휴식시간에 전자기기 대신 펜과 필사 책을 꺼내 들게 됐고 지금까지 필사 관련 책을 이용하고 있다.

   K씨는 “전에는 책보다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 날이 많았다. 우연히 접하게 된 필사 책 덕분에 독서량이 증가했고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또한, 글씨를 쓰는 순간만큼은 바쁜 삶에서 벗어나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매력적이다”라고 필사의 장점을 설명했다.

 

필사를 이용한 다양한 활동 열려

   필사는 다양한 분야에서도 그 활용도가 높다. 교보문고에서는 초록어린이재단과 함께 필사와 기부를 결합한 ‘시 한 편, 밥 한 끼’ 캠페인을 진행했다. 독자가 영업점에 비치된 엽서에 시 한 편을 손글씨로 작성하면 일정 금액이 아프리카 어린이의 식사비용으로 지원된다.   이 캠페인은 간단한 손의 노동으로 기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지난해 9월부터 국립현대미술관(MMCA)에서 열린 안규철 작가의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展’은 미술의 경계를 넘어 문학, 건축, 음악, 영상, 퍼포먼스, 출판 등 여러 분야의 주제를 다뤘다. 여기서 ‘1,000명의 책’이라는 코너는 관람객의 반응이 가장 뜨겁다. ‘1,000명의 책’은 관람객 1,000명이 1시간씩 교대로 ‘필경사의 방’에 들어가 작가가 선정한 작품을 손으로 쓰는 프로젝트다. 안 작가는 필사를 통해 ‘손으로

   글 쓰는 행위’의 의미를 되새기길 바라는 마음에서 독립된 공간을 마련했다. 필사 참가자는 미술관 홈페이지(mmca.go.kr)를 통해 매달 신청 받는데 창이 열릴 때마다 20분 만에 마감된다. 이렇게 1,000명이 쓴 필사본은 한정 부수로 인쇄된 후 참가자들에게 발송된다.

   필사는 문학 외에도 영화나 드라마 대사, 노래 가사, 명언 등 개인의 관심사에 따라 그 대상과 활용 범위가 넓다. 빠른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필사는 단순 글쓰기가 아니라 생각을 정리하고 여유를 추구하는 ‘힐링 문화’로 변화하고 있다.

*안규철 작가의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서울관)에서 5월 22일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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