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10일, 더불어민주당 도종환 의원이 국정감사에서 문화예술위원회의 회의록을 공개하면서 정부가 문화예술을 검열한 정황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정부는 야당 후보를 지지하거나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을 위한 서명을 했다는 등의 이해할 수 없는 이유를 들며 문화·예술인을 통제했다. 최근 들어서야 블랙리스트가 세간의 주목을 받았지만, 이는 비단 오늘날만의 일이 아니다. 과거에도 정부는 불온서적, 금지곡 등을 지정해 예술의 자유에 개입했다. 현재의 블랙리스트는 과거의 검열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결국 그 연장선에 있다. 따라서 본지 기자들은 블랙리스트의 과거와 현재를 직접 조사해봤다. 대한민국에서 거듭 반복되는 정부의 검열을 그만두기 위해서라도 블랙리스트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려 한다.

지난 7일,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 장관이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및 국회증언감정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 됐다. 바로 특정 문화예술인의 국가 지원을 검열하는 이른바 ‘블랙리스트’를 작성한 정황이 포착된 것이다. 매스컴을 통해 블랙리스트의 존재가 처음 등장한 것은 지난달 9일 진행된 ‘제7차 최순실 국정농단 청문회’에서다. 이날 증인으로 참석한 조윤선 전 문체부 장관은 무려 17차례나 계속된 국회의원의 질의에 “예술인의 지원을 배제하는 명단이 있던 것으로 판단된다”라며, 사실상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시인했다. 이는 2013년 상연된 박근혜 대통령을 풍자하는 내용의 연극 <개구리>를 시발점으로 암암리에 작성돼 오던 블랙리스트의 케케묵은 실체가 전 국민 앞에서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청와대는 이러한 블랙리스트의 구심점으로서 명단 작성을 주도했고 문체부는 이를 실행에 옮겼다. 목록에 오른 이들을 각종 지원 사업에서 제외하거나 해당 작품의 지원금을 대폭 삭감한 것이다. 주로 정부를 비판하거나 야당 후보를 지지한 예술인이 탄압 대상으로 지목됐다. 또한,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을 요구한 문화인도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이들의 작품을 지원하거나 제작을 부조해도 어김없이 명단에 기재됐다. 이처럼 자본의 힘으로 창작의 자유를 훼손당한 문화예술인들은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거나 전업해야 했다. 정부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부당한 이유로 낙인이 찍혀버린 것이다.

사상이란 명목하에 폭력으로 검열되던 그 시절
블랙리스트는 시대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전승돼왔다. 자본의 힘이 막강한 현대와 달리, 과거에는 물리적인 폭력으로써의 문화 검열이 대대적으로 행해졌다. 먼저, 우리나라의 1970-80년대는 군사정권이 집권하던 시기로, 문화예술에 대한 각종 검열이 자행됐던 때다. 특히, 1975년 5월 13일에 〈대통령긴급조치 제9호〉가 발표되면서 ‘유신헌법을 부정, 반대, 비방한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압수 또는 수색할 수 있다’라는 세부 내용에 따라 본격적으로 금지곡을 검열하는 조치가 시작됐다. 이에 따라 작품을 통해 정부를 은유하거나 묘사하기만 해도,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논문 「한국 군사정권하의 금지곡에 대한 작사가별 분석」을 살펴보면, 군사정권 당시 노래에 대한 검열이 이뤄졌던 정치적 이유로는 반체제적, 반이데올로기적 또는 반정부적인 성향 등을 찾아볼 수 있다. 게다가 월북 작가의 작품과 반정부적인 가사를 포함한 저항 음악은 정부의 통제를 받는 노래 중에서도 가장 대표성을 띄었다.

실례로 같은 연도에 발표된 〈공연활동 정화대책〉으로 인해 약 90일 동안 3차례에 걸쳐 총 222곡이 금지곡으로 지정받는데, 1차에는 월북 작가의 곡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2차는 반정부적 또는 사회 윤리적 사유에 의한 금지곡이 주를 이뤘다. 최초의 방송금지곡인 〈기로의 황혼〉의 가사를 썼던 조명암 작사가는 월북했다는 사유로 1차 검열에서 총 45곡에 달하는 곡이 금지곡이 됐다. 유행가의 작사자였던 그의 곡을 금지곡으로 만들 수 없었던 몇몇 작곡가와 음반사가 실제로 조명암 작사가의 곡을 작가명만 다른 이로 바꿔 음반을 내는 일도 있었다. 이러한 해프닝을 통해 대중예술이 국가안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요지에서 실행된 〈공연활동 정화대책〉이 정부의 독재적인 잣대 아래서 매우 작위적으로 이뤄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단순히 만든 사람의 사상이 반정부적이라는 이유만으로 국가 권력을 행사한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에 발맞춰 같은 해 12월 31일에 「공연법」이 개정됐고 1976년 한국공연윤리위원회(이하 공륜)가 설치됐다. 당시 공륜은 공연물과 음반 등에 대한 검열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한 법정기구였다. 가장 대표적인 검열의 행태로 공륜은 사전 심의를 통해 음반 제작을 허가하고 납본을 통한 사후 심의를 통과해야 배포할 수 있도록 하는 ‘이중 심의제도’를 실시했다. 이전에는 기존의 노래를 검열해 통제하는 방식이었다면 더 나아가 정부는 생산 단계부터 개입함으로써 예술의 자유를 침해하고자 했다.

반면에 문학은 앞서 살펴본 음악 외에 영화, 연극이 각 관계법에 의한 사전 검열을 받았던 것과 달리 직접 관련된 관계법이 없다. 주로 문학 작품이 게재되는 신문 및 출판매체에 의해 간접적으로 검열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공주의를 국민에게 강제하는 가장 핵심적 법인 국가보안법에는 문학을 규제하는 요소가 포함돼있다. 바로 국가보안법 제7조 5항이다. 1991년 5월 31일에 개정된 본 법안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반국가단체의 활동을 할 목적으로 문서·도서 기타의 표현물을 제작·수입·복사·소지·운반·반포·판매 또는 취득한 자는 그 각항에 정한 형에 처한다’는 규정을 포함함으로써 문학 및 예술 분야에서 표현의 자유는 억압당했다.

박정희 정권 시기에 끊이지 않았던 필화사건 중 1970년대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김지하 시인의 ‘오적 필화사건’이다. 필화 사건이란 작품으로 인해 권력과 기타 세력의 핍박 또는 제재를 받은 일을 일컫는다. 이는 당시 한일협정반대운동에 참여했던 김지하 시인이 재벌과 국회의원 등의 권력자를 오적이라 지칭해 비판했던 「오적」이 ‘계급의식을 조성해 북한의 선전자료에 이용됐다’라는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 된 사건이다. 당시 김지하 시인을 비롯해 「사상계」의 대표와 편집장이 유죄판결을 받았던 이유인 반공법은 위의 국가보안법 중에서도 공산주의 활동에 대한 특별법의 성격을 띠고 있다.

「반공주의와 검열 그리고 문학」의 저자인 성균관대 이봉범 교수는 본 논문을 통해 국가권력의 검열에 대해 “1948년 극우 반공체제의 성립과 그에 따른 좌익세력의 괴멸이 이뤄진 상황에서 정부가 국가보안법을 무기로 사상통제를 지속해서 수행한 것은 좌익 환산을 방지하는 것보다도 정권의 안보가 목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자본의 힘으로 압박당하는 오늘날의 문화예술인
2017년, 현재 문화예술계의 형편도 사실 박정희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어쩌면 ‘정권안보’라는 같은 목적으로 문화인들을 탄압하는 것이 옛날 일만은 아니란 것이다. 지난 9일, 서울 서초구의 한 사무실에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은 기자회견을 열고 박근혜 정부가 주도해온 블랙리스트 사태에 대한 법적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박근혜 대통령과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조윤선 전 문체부 장관 등을 상대로 블랙리스트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하겠다는 것이다. 이번 소송에는 예술인 461명이 원고로 참여하며, 1인당 손해배상 청구액은 100만 원으로 책정됐다. 다만, 현재 약 1만 명의 문화계 인사가 블랙리스트에 기재돼 있고, 아직도 참가자가 늘어나고 있어서 소송인단 수는 더 증가할 것으로 예측된다.

이러한 정세는 그간 블랙리스트로 인해 쌓여왔던 문화예술인의 분노를 대변해 보여준다.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입증할만한 증거가 없어 무차별적인 피해를 받았는데 그 실체가 드러나자 억울함을 호소하는 예술인들의 봇물이 터진 것이다. 이에 대리인단 소속 전민경 변호사는 “이유도 모른 채 예술창작 활동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던 점을 고려하면 그 손해가 산정하기 어려울 만큼 크다”라며 원고의 피해 유형과 정도에 따라 손해배상 청구액을 늘릴 예정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피해 사례를 자세히 살펴보면 문화인들은 창작 활동의 고충을 넘어 생존권의 위협을 받고 있다. 이는 과거의 정부가 반대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고 ‘불온’이라는 이름으로 각종 서적과 곡을 금했던 방식과 조금 다르다. 바로 거대 자본의 힘으로 경제 활동을 압박해 문화인들을 무력화시킨 것이다. 그렇기에 자금 영향이 큰 문화예술계에서 한 번 블랙리스트에 오르면 경제적 궁핍은 물론이며 사회적으로도 단절될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살생부로 인해 문학과 공연, 음악 등 다양한 영역의 문화예술인이 고통받지만, 그중에서도 영화계의 실정은 더욱 가혹하다. 상업 영화의 45%가 정부의 자금으로 운용되는 모태펀드의 투자를 받아 제작되기 때문이다.

그 예로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변호인>의 제작자 최재원 대표는 이 영화를 통해 천만 관객을 달성하는 쾌거를 이뤘지만, 한동안 영화계에서 이름을 숨겨야 했다. 해당 영화를 제작하면서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각종 지원금 사업에서 배제됐기 때문이다. 결국, 최 대표는 외국계 기업인 워너브러더스로 이직하고서야 다시금 제작 현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독립영화 배급사 시네마달의 사정도 좋지 않다. 시네마달은 세월호 참사를 다룬 영화 <다이빙벨>을 배급한 회사다. 이 영화를 계기로 시네마달은 정부의 본격적인 사찰 대상에 올랐으며 심지어 지난 2016년에는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원 대상에서 배제됐다.

4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대표적인 문인단체 ‘한국작가회의’는 이러한 정부의 파렴치한 행태에 앞장서서 대응하고 있다. 한국작가회의는 1970년대에 박정희 정권의 유신 체제를 비난하고 ‘표현의 자유와 사회의 민주화’를 외친다. 자신들의 신념과 가치를 지키기 위해 한국작가회의에 속한 많은 문인이 오늘날 박근혜 정부에 저항했고, 결국 블랙리스트 명단에 이름이 올랐다. 이에 본지는 정부 지원이 끊기는 실태와 그에 저항하고 있는 문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기 위해 한국작가회의에서 사무처장을 맡는 홍명진 소설가를 직접 만났다.

정부 관계자 직접 찾아와 시위 불참 각서 요구하기도
먼저, 홍명진 사무처장은 “한국작가회의에 속한 한 작가가 실제로 정부 지원금을 받지 못했던 적이 있어요. 당선되면 지원금을 받을 수 있는 ‘아르코 문학상’에서 대상에 선정될 예정이었지만, 상을 받지 못했죠. 결국, 상금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라며 블랙리스트로 인해 정부 지원을 받지 못한 문학계의 사례를 언급했다. 아르코 문학상은 문화예술위원회가 공고를 내서 문학인을 심사하고 지원해주는 정책이다. 홍 사무처장은 “해당 문학상의 심사 위원 중 일부가 한국작가회의 소속이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대상을 받는지는 입소문을 통해 먼저 들었어요. 그러나 발표 당일에 예상한 심사 결과와 지원금 대상이 다르게 공지됐죠”라며 당시 상황을 전했다. 뒤늦게 알려진 바에 따르면, 정부는 문화예술위원회에 블랙리스트 문인을 수상 명단에서 제외할 것을 지시했고 아르코 문학상에 할당된 예산의 3분의 1을 삭감하면서 문화예술인을 통제했다.

이뿐만 아니라, 정부는 한국작가회의 단체에 할당되는 예산도 끊었다. 한국작가회의에서는 1년에 4번씩 『내일을 여는 작가』를 발행하는데, 이를 출판하는 데 쓰일 예산이 본래 문화예술위원회에서 지급됐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에 접어든 후 지원금은 삭감됐다. 광우병 촛불집회에 한국작가회의 단체가 참여한 후, 정부 관계자가 사무실에 찾아와 시위 불참 각서를 작성하라고 압박했는데, 이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소속된 작가들이 조금씩 회비를 모아 책을 발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한국작가회의의 재정이 궁핍해지고 운영이 어려워지게 됐다.

이처럼 정부의 제재는 문인에게 치명타를 입힌다. 문학 분야 외에 다른 업무를 병행하지 않는 전업 작가는 창작 활동을 하는 데 필요한 기초 생활비를 정부로 부터 지원받는다. 그러나 블랙리스트 명단에 오른 작가에게는 지원금이 부여되지 않아 창작활동을 할 여건이 조성되지 못했다. 또한, 문학의 융성과 발전을 위해 투자돼야 하는 금액이 필수적으로 존재하지만, 이들은 해당 지원금을 받을 수 없었다. 홍 처장은 “버클리대학교에서 문학 행사를 열기 위해 한국 문인 네 분을 초청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한국작가회의의 이시영 시인도 연락을 받았죠. 그러나 한국문학번역원에서는 블랙리스트에 없는 2명만 항공료를 지원했어요. 결국, 이시영 시인은 버클리대학교에서 직접 항공료를 지원받아 행사에 참여할 수 있었지만, 한국의 문학을 외국에 알릴 기회를 놓칠 뻔했죠”라고 말하며 정부 지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피해를 바로잡기 위해 그들은 현재까지 광화문 광장에서 촛불 집회를 이어나가고 있다. 시국선언은 물론, 시 낭송 등의 문화 행사를 기획하고 1인 텐트에서 노숙하며 현 시국에 저항하는 것이다. 또한, 정부 기관이나 문체부 지사 앞에 직접 찾아가 기자회견을 열어 정부를 압박한다. 작년 12월 29일에는 헌법재판소(이하 헌재) 앞에서 한국작가회의를 포함한 문화예술단체가 ‘블랙리스트 관련 조윤선 문체부 장관의 증거인멸 중단 및 사퇴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헌재에 의견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결국, 이 같은 행동으로 인해 박근혜 탄핵 사유에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탄압’을 추가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문화연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등과 힘을 합쳐 빼앗긴 지원금을 되찾기 위한 소송도 진행 중이다. 아울러, 얼마 후에는 현 시국을 규탄하는 ‘민족 촛불시집’도 발간하는 등 멈추지 않고 저항하고 있다.

본교 여태천(인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2000년대 한국 사회에 다시금 국가주의가 등장한 것 같다”라고 말하며 현 사태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 국가주의란, 국가의 최고 통치 이념으로 공익을 지향하는 사상이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이를 사적으로 표방해 국민의 이익보다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했다. 덧붙여, 여 교수는 이번 블랙리스트 사건이 샤머니즘이라는 사적인 영역 아래에 지배되는 국가의 위험성을 낱낱이 보여준다고 했다.

군부독재 치하에서 벗어나 ‘민주주의’의 시대가 왔다고 외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마저도 최근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 사태로 인해 희미해져 간다. 창작의 자유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사회를 살아가며 실상을 가장한 거짓 민주주의에 대해 갈등하게 되는 것이다.

앞서 구속기소 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문체부 장관의 재판이 진행 중이다. 또한, 특검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블랙리스트에 관여한 정황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지금이 바로 사회에 깊숙이 침투한 정부발 ‘검열’을 박멸시킬 기회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이에 관해 관심을 두고 지켜보는 것이 곧 우리 문화예술계를 지켜내는 일이며, 나아가 바로 선 민주주의의 시작이 될 것이다.


문아영 기자 dkdud4729@naver.com
김규희 기자 kbie1706@naver.com
김진경 기자 wlsrud684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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