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당역을 나와 조금만 올라가다 보면 예술가 마을이 있다. 외관상으로는 별로 ‘예술적'으로 보이지 않는 동네 이름에 대해 물으니 원래는 시인들이 모여 살기 시작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현재는 다양한 분야의 예술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동네 슈퍼마켓 이름까지도 ‘예술가마을슈퍼마켓’인 예술가 마을에 있는 백정기 씨의 작업실을 찾았다. 대학교에 강의를 나가고 있다는 ‘미술작가’ 백정기 씨는 서른한 살이라는 젊은 나이지만 벌써 자신이 기획한 개인전을 여러 번 가졌다.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지하 작업실이라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춥다고 한다. 5월이지만 그는 아직도 전기난로를 사용하고 있었다. 기자들의 방문에 오랜만에 대청소를 했다고 말하며 커피 한 잔 마시겠냐고 묻더니 핸드그라인더로 원두를 직접 갈아 만든 커피를 내놓았다.

  

▲ 미술작가 백정기 씨
백정기 씨는 국민대 조소과를 졸업했다. 어렸을 때부터 미술을 했고 예고를 나와 미대에 갔다. “미술에 관심이 많으셨던 아버지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아버지가 얼마 전에 30년간 다니시던 직장을 정년퇴임 하시고 미술을 시작하셨어요. 평생교육원에 다니시다가 요즘에는 작품 활동을 하시고 계세요. 전시도 하고 저보다 작품도 많이 파세요"
   백 씨는 설치미술뿐만 아니라 영상이나 사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다른 예술가들에 비해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그를 보고 독특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는 분야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작품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려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는 2004년 대학을 졸업하고 2006년에 첫 전시회를 열었다. 백 씨는 자신의 첫 전시회가 큰 전환점이 됐다고 한다. “작가들한테 첫 개인전은 ‘모르고 덤볐다가 크게 얻어맞는’ 것과 같아요. 저도 그랬어요. 작업을 계속해야 하는지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주변의 권유로 유학을 결정하게 됐어요” 그는 외국 유학생활을 하면서 작업 방식이 많이 바뀌었다고 했다. “사람은 스스로 바뀌어야 된다고 느끼는 때가 있잖아요. 저는 첫 전시회가 그랬어요. 이전에 가졌던 생각을 버리고 보다 관념적인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됐어요”

전화위복의 사나이
   그는 두 살 때 집에 불이 나 왼쪽 손에 큰 상처를 입어 새끼손가락이 짧다. 그의 초기 작품은 치유에 관련된 작품이 많은데 어릴 적 사고에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신체적으로는 아무런 불편이 없었어요. 기억은 나지 않지만 초등학교 때 놀림을 많이 당했던 것 같아요. 그 기억이 제게 어떤 각인으로 남아 작품 활동을 하는데 영향을 주었던 것 같아요”
백정기 씨의 초기 작품은 주로 바셀린을 이용해 손이나 신체에 갑옷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그런 그의 작품이 치유가 아닌 관념적인 주제로 바뀌어 갔다. “초기에는 어렸을 때 겪은 사고에 대해 많이 말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그게 부끄러워졌어요.모든 사람이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잖아요. 제 상처가 무슨 특별한 것처럼 드러내는게 뭔가 유치하고 부끄럽더라고요. 그 후에는 갑옷을 만드는 것에 관심이 없어졌어요. 방어기재를 미술이나 체육을 통해 치료하기도 하잖아요. 제가 한 작업이 어느 순간 제 상처를 치료한 것 같기도 해요”


“돈 없이 어떻게 살았냐고요?
어떻게든 살아지더라고요”

   미대를 졸업하고 예술가의 길로 뛰어드는 사람은 별로 없다. 스무 명 중 한두 명만이 작가가 되길 원한다. 백정기 씨는 그 한두 명 중 하나였다. “전 좀 우직한 편이에요. 만들고 싶은 것이 있고 작업을 하는 것 자체가 재미있어요. 물론 처음이나 지금이나 돈은 많이 벌지 못해요. 생각해보면 제가 어떻게 살았는지도 궁금해요. 아등바등 살다보니까 이십대가 지나가더라고요. 그동안 고생했던 경험이 지금의 밑바탕이 된 것 같아요. 고생을 많이 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경험들이 어느 순간 뭔가로 만들어지더라고요. 어떻게든 살아남았고, 지금까지 버티고 있어요"
   현재 그는 대학 시간강사 일을 해서 생활비를 벌고 있다. 작품을 만들기 위한 비용은 공모전을 통해 마련한다고 한다. “많은 작가들이 문화예술진흥회 같은 곳에서 하는 공모전에 지원해요. 작가 개인이나 단체로 참여하는 프로젝트가 있어요. 저도 다음 전시에 쓸 자금을 공모전을 통해 마련해요"
 

그러려는 의도는 아니었는데…

   백 씨가 전시한 프로젝트 중 자연과 관련된 것들도 상당하다. 2010년에 작업한 <Blue Pond>가 그 중 하나다. “사람들이 깨끗한 물을 보면 ‘파랗다’고 하잖아요. 파랗다는 것은 깨끗하다는 기호적인 색깔인데 이것을 실제화했어요. 어떻게 보면 처음 의도와는 다르게 사람들이 징그러워하더라고요. 비현실적이라고 느낀다는 건 물체의 관념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 대상의 본질을 환기하는 것을 뜻해요. 우리가 현실에서 관념시킨 것과 실제화시킨 관념 사이에 괴리가 있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 거죠"
   백 씨는 사람들이 자연을 단어나 색으로 한정지으려고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 같은 사람들의 생각을 환기하기 위해 <Blue Pond>와 <Sweet Rain> 같은 작업을 진행했다. <Sweet Rain>은 전시장에 사카린과 포도당이 섞인 물을 비처럼 내리게 하여 관객들이 직접체험하게 했다. 하지만 두 작품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달랐다. <Blue Pond>의 경우, 사람들이 비현실적으로 느끼는 반면에 <Sweet Rain>은단맛이 나는 비를 맛보며 즐거워했다.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을 어떻게 봤으면 좋겠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관객들에게 틀을 만들어주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했다. “저는 작품과 관객 사이의 다리를 놓아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에요. 작품과 관객 중심에 있는 사람이죠. 사람들이 제 작품을 어떻게 봐주었으면 하고 바라지 않아요. 관객에게 ‘어디까지 생각해보라’고 한다면 작품 자체가 딱딱해질 수도 있거든요. 작업을 하면서 관객을 좌지우지 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어요. 저는 어느 정도까지만 관여하고 나머지는 관객에게 맡기는 거죠”
 

작가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백정기 씨는 다양한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여러 가지에서 모토를 얻는다고 말한다. 작업을 하기 전에 조그맣게 프로토 타입(축소모형)을 만들어서 실험해보고 그것을 응용해서 다른 것을 만들기도 하면서 작업을 하기 전 준비 기간을 갖는다. “실제로 모든 작업을 다 제가 하는 것은 아니에요. 저는 제가 만드는 작품의 원리까지 연구한 다음에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과 이야기해요. 제가 프로토 타입을 만들어보고 연구한다고 해도 실패할 가능성은 있잖아요. 실패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서 그 분야의 전문가와 많이 만나요. 저 같은 경우, 혼자서 작업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해요. 어느 정도 작가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요? 한 가지 이상은 잘 못하는 성격이에요”

   백 씨는 작품에 대한 영감을 주로 책에서 얻는다고 한다. 그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근처에 위치한 국립중앙도서관을 찾는다. “작업이 항상 진행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작업이 잘 안될 때 책을 많이 읽어요. 제가 한 가지 이상은 잘 못하는 성격이에요. 그래서 책을 읽을 때도 한 달 동안 ‘죽어라’ 읽고 한 달 죽어라 일해요"
   요즘 그는 주로 지구과학책을 읽고 있다. “올해 유월에 미국에서 전시가 있어요. 진동에 관련된 작업이에요. 커다란 연못에 수중 스피커를 이용한 설치 작품을 준비하고 있어요. 작품 크기가 커서 한국에서 리허설을 해보고 미국에서 만들 거예요. 내년엔 한국에서 전시회를 열 예정이에요"

   인터뷰를 마친 후 그와 조금 더 앉아서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가 다녔던 여행 얘기를 비롯해 다양한 에피소드를 들을 수 있었다. 작업실을 나오며 아쉬웠던 점은 그가 자신의 자전거에 모터를 달아 만들었다는 ‘바이크 겸용 자전거’를 구경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언젠간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날 그가 대접한 커피가 참 맛있었다는 인사도 함께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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