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에서 계좌를 하나 만들 때는 반드시 신분증을 들고 가야 한다. 은행을 운영하는 금융회사는 계좌를 만들려고 온 고객과 신분증에 나와 있는 정보가 일치하는지를 확인해야 계좌를 만들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상식이 돼 버렸지만 24년 전만 해도 이렇지 않았다. 신분증이 필요 없는 것은 물론이고 계좌 명의를 자기 이름으로 하지 않아도 됐다. 심지어 개똥이라거나 유명 연예인 이름을 가져다 써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실명 거래가 상식이 된 것은 1993년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헌법적 권리인 대통령 긴급재정명령권을 발동해 ‘금융실명제’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이후부터 금융거래는 실명으로 해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과징금과 징벌적 세금을 물었다. 금융거래를 투명하게 해 재산 은닉이나 탈세 등을 막기 위한 것으로, 김영삼 정부의 가장 개혁적인 조처였다. 이후 금융실명제는 1997년 12월에 ‘금융실명 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이하 금융실명법)’로 입법된다. 


  금융실명제 논의가 24년 만에 되살아났다. 2008년 삼성특검에 의해 4조4,000억 원대의 재산을 천여 개 차명계좌로 운용해온 사실이 드러난 이건희 삼성 회장이, 해당 연도에 세금 한 푼 내지 않고 모조리 되찾아간 것으로 최근 확인됐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행위를 정부가 ‘합법적인 행위’로 간주해왔다는 데 있었다. 이 회장이 운용한 계좌는 차명계좌이긴 하지만, 임직원 실명으로 개설된 실명계좌로 봤기 때문이다.


  차명계좌도 실명계좌라는 쉽게 납득하기 힘든 정부의 법률 해석은 금융실명법이 완벽하지 않다는 점을 부각했다. 실제 금융실명법을 살펴보면 금융회사는 거래자의 실명으로 거래하여야 한다고 돼 있는데, 이 거래자가 재산의 실소유주를 뜻하는지 아니면 계좌 명의인을 가리키는지 밝히지 않고 있다. 그 대신 금융회사에 계좌주의 실명 확인 의무를 부여하고 이를 지키지 않은 금융회사에 과태료 처분을 하도록 하고 있을 뿐이다. 법에 큰 구멍이 있는 셈이다.


  이런 허점은 금융회사 입장에서 계좌의 실소유주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어 발생하게 됐다. 한 예로 여러분이 부모님 돈을 들고 본인 명의의 예금 계좌를 만들러 은행에 갔다고 생각해보자. 은행 직원은 그 돈의 주인이 여러분인지 여러분의 부모님인지 파악할 수 있을까? 이런 점에서 사실 금융실명법은 차명계좌 자체를 금지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법의 공백을 틈타 소득을 숨겨 탈세하거나 검은돈을 숨기려는 이들이 우리 사회에 여전히 존재하며 이를 적발해내기 쉽지 않아 더욱 문제가 되고 있다.


김경락 한겨레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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