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 읽던 메밀꽃밭을 '쌩눈'으로 보다

 낯선 경상도 말투, 건너편에 앉은 여행객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 그리고 덜컹거리는 소리에 맞춰 스쳐 가는 창밖 풍경. 아침부터 서두른 탓인지 출발과 동시에 꾸벅꾸벅 졸다 깨어 보니 기자를 태운 청량리발 무궁화호는 경상도 어딘가를 달리고 있었다. 지겹게도 내리던 비가 잠시 그쳤던 지난 6월 말 기자는 여행을 떠났다. 처음으로 혼자 떠나는 여행이었고 비가 온다는 기상예보가 있어 두려움과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낯선 곳으로 잠시나마 떠나고 싶은 마음과 혼자 떠나는 여행에 대한 기대가 더 컸기에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내일로 티켓을 구입해 막무가내로 떠났다.
  코레일에서 발급하는 '내일로(Rail 路)' 티켓은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기간 동안 만 25세 이하 청소년들이 7일간 새마을호, 누리로, 무궁화호, 통근열차의 자유석 및 입석을 이용할 수 있는 패스형 여행 상품이다. 기자는 초보자들이 많이 찾는 코스 중에서도 평소 가고 싶었던 안동-경주-통영을 여행 코스로 삼았다.
  첫 여행지 안동에서는 하회마을과 역 주변을 둘러보았다. 안동역에서부터 버스로 약 40분 거리에 있는 하회마을은 말 그대로 ‘마을’이었다. 전시를 위해 꾸며진 민속촌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 오랜 세월에 걸쳐 지금까지 사람들이 살아가는. 문화재로 등록된 옛 가옥에는 여느 가정집처럼 안주인이 수돗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고 살림도구가 놓여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 아닌 시골 할머니 댁과 같았다. 마을을 휘감고 흐르는 낙동강과 마을 어귀의 오솔길은 마치 마을을 품고 있는 듯해 더욱 푸근한 인상을 주었다.
  안동에 이어 찾아간 경주는 천년고도인 만큼 시 전체가 하나의 유적지였다. 기자는 자전거를 대여해 분황사지, 경주국립박물관, 월성, 계림, 천마총, 첨성대, 안압지 등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화창한 여름날 자전거를 타고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배경 삼아 경주 곳곳을 누비며 유적지를 탐방했던 경주에서의 첫날, 그 어떤 호화 여행에서도 느낄 수 없을 낭만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월성 안의 드넓은 메밀꽃밭은 이번 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은 장관이었다. 소설 속에서 글로만 어렴풋이 느꼈던 하얀 메밀꽃이 밭을 이루며 흰 눈송이처럼 흐드러지게 핀 장관이 눈앞에 펼쳐지자 저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마지막 여행지 통영에서는 폭우와 안개 때문에 제대로 여행할 수 없었다. 무리를 해서 배를 타고 소매물도까지 들어갔지만 기자의 객기를 비웃듯 육지에서 멀어질수록 말 그대로 한치 앞도 허락하지 않는 바다 안개과 거센 파도만이 맞이해줄 뿐이었다. 아름다운 소물도 등대섬은 오후가 돼서야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었는데 그 광경마저도 아름다워 아쉬움이 더 컸다. 마지막으로 한려수도조망케이블카를 타고 여행을 마무리했다.
  여행을 하는 동안 모든 일들이 기자가 예상한 대로 이뤄지지는 않았다. 길을 헤매고, 차를 놓치거나 날씨가 좋지 않는 등 여러 돌발 상황들이 무수히 일어났다. 그러나 그 속에서 예상치 않은 사람과 풍경을 마주할 수 있었다. 특히 혼자이기에 나만의 속도로, 시야로 집중할 수 있었고 나 이외의 것들에 더 관심 쓰고 또 관심 받을 수도 있었다. 3박4일간의 짧은 여행 동안 나는 유독 그런 인연들을 많이 만났던 것 같다. 밥을 사주시며 좋은 말씀을 해주신 어르신, 안동에서 만나 경주까지 함께한 재현 언니, 소매물도 아이스크림남, 통영 베스트 드라이버 아주머니 등.
  “완벽한 여행이란 여행 자체의 완벽한 만끽이다. 그 순간, 그 상황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려는 자세로부터 나오는”이라는 여행을 주제로 쓴 어느 칼럼의 대목을 이번 여행을 통해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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