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지만 체계적인 도로명주소

  비행기를 타고 외국을 오갈 때 출입국 신고서나 세관 신고서 등에 외국어로 한국 주소를 써야 할 일이 있다. 독일에서 서류 작성을 위해 한국 주소를 써야 했는데, 당시 독일인은 빈칸에 “네가 사는 스트릿(거리) 이름을 적어라”라고 했다. 그때 기자가 한국에는 거리 이름이 없고 지역(동) 이름만 있다고 말해줬다. 의아한 듯 고개를 갸우뚱하던 독일인은 결국 도로명이 없다면 지역 이름이라도 적으라고 했다.


  도로명주소는 100년 만에 바뀌는 대한민국의 새로운 주소체계다. 기존의 지번주소는 집이나 도로가 번지의 순서대로 있지 않고 만들어질 때마다 번호를 부여했다. 이는 중구난방식으로 설정돼 위급한 상황이 있을 때 번지만으로 빨리 위치를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지번주소에서 100번지 옆에 101번지가 있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특히 복잡한 주택가에서 번지수로 집을 찾는 것은 그야말로 ‘서울에서 김 서방 찾기’와 다를 바 없었다.


  도로명주소 사업을 맡고 있는 안전행정부의 유정복 장관은 “우리나라 집배원이나 택배 배달하시는 분들은 천재다. 복잡하고 순서도 없는 지번주소만으로 위치를 찾아내는 것은 그분들이 오랜 세월 숙련돼 익힌 것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길에 이름을 붙이고, 주택과 건물은 길에 있는 순서에 따라 차례대로 번호를 붙여 찾기 쉽게 만든 도로명주소는 세계적으로 북한·중국·러시아·아프리카 등 거의 모든 나라가 쓰는 주소체계다. 일본은 아직 대체적으로 지번주소를 쓰고 있지만, 지방자치단체부터 도로명주소로 변환해 나가고 있다.


  아파트에 사는 사람은 사실 자신이 사는 아파트의 지번주소 번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요즘 주소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경우는 택배 배달인데, 이때 아파트 이름과 동, 호수만 쓰면 되기 때문이다. 원래 도로명주소는 아파트 이름도 없이 도로명과 번지수만 쓰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동과 아파트 이름을 아예 안 쓰는 것에 대한 민원을 제기하자 결국 아파트 이름은 병행 표기하는 것으로 정책이 약간 바뀌었다.


  도로명주소로 변환하면 지금 당장 불편할지 몰라도 결국 세계 표준에 맞추는 일이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득이 되고 오히려 훨씬 편할 것이다. 도로명주소를 못마땅해 하는 여론의 배경에는 일부 ‘지역이기주의’가 얽혀 있다는 분석도 있다.


  예를 들어 ○○동, △△동이란 지역 명칭에는 이미 사람들의 선입견이 고정화됐다. 어느 동은 부촌이라거나 어떤 동은 달동네라는 등의 고착화된 이미지가 도로명주소에서는 사라지게 된다. 또 원래 도로명주소에는 아파트 이름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아파트 브랜드 홍보에 많은 돈을 쏟아 부었던 건설회사들은 배가 아플 수 있다. 일부 아파트 주민은 브랜드에 따라 집값이 움직이자 아파트 이름을 바꾸기도 했다.


  한 편에서는 100년 동안 써온 주소 체계를 굳이 국제 표준에 맞춘다는 이유로 수천억 원의 예산을 들여 굳이 불편하게 바꿀 필요가 있느냐는 지적도 있다. 이미 스마트폰과 내비게이션이 보편화된 마당에 도로명주소로 바꾸지 않더라도 길 찾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뭐든지 그동안 익숙했던 것을 바꾸려면 불편함이 따른다. 면적 단위도 30평, 40평에만 익숙하다가 제곱미터로 기준이 바뀌면서 혼란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정착 단계에 접어들었다. 도로명주소로 지금 당장 바꾸는 것은 무리겠지만, 한 세대가 바뀌는 동안 점점 도로명에 익숙한 세대가 주된 사회구성원이 되는 시점이 올 것이다. 100년 전 갑오경장이 지금으로 치면 헌법과 정부조직법을 새로 제정하는 근대로의 개혁이었다면, 100년 뒤인 2014년 갑오년에는 세계적인 표준과 함께 하는 의미 있는 변화가 시작됐다. 10년 가까이 도로명주소 정착을 위해 노력했는데 이제 와서 모든 것을 중단하고 다시 옛 지번주소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의미 있고 발전된 변화를 만드는 것은 결국 쓰는 사람들의 몫일 것이다.

저작권자 © 동덕여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