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사회는 ‘재난의 일상화’라는 표현이 적절한 듯하다. 세월호 참사뿐만 아니라 지하철 사고, 각종 화재, 방화 등 사회 곳곳에서 대형 참사의 위험을 알리는 신호가 감지되고 있다. 그런데 이들 사건을 언급하는 과정에서 소위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말’이 구설수에 오르는 것을 볼 수 있다. 때론 단순한 말실수일 수 있겠지만, 어떤 경우에는 앞뒤 맥락을 볼 때 지금까지 그들이 숨겨왔던 가치관이나 세계관, 인간관이 드러나기도 한다.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반말’에 관한 것이다. 한국어의 중요한 특징은 높임말, 즉 존댓말이다. 간혹 다른 언어에도 있긴 하지만 한국어만큼 존댓말의 비중이나 중요성이 큰 경우는 드물다. 어린아이는 어느 정도 말을 하기 시작하면 존댓말을 배우게 된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말을 한 마디 할 때마다 존댓말을 가르치거나 교정한다. 그것은 단순한 예의를 넘어 그 과정에서 획득하는 자신들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다.

 ‘반말’은 친구나 후배 등 아주 가까운 사이에 주로 사용한다. 모르는 사이에는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직장에서 직급이 낮고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 반말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예외적인 경우가 많다. 가끔 정치인 중에서 젊은 세대를 만날 때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지방선거를 맞이해 정치인이 시민을 만나거나 토론하는 과정에서 반말하는 경우 역시 보게 된다. 그것은 단순히 반말이라는 형식을 넘어 그들이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여준다. 사람이 말을 하는 방식, 즉 말투와 같은 것은 갑자기 바꿀 수 없다. 이미 몇 십 년 동안 자신의 일과 생활에서 내면화된 결과로 나타난다. 결국, 말을 통해 우리는 그의 삶을 알게 되는 것이다. 특히 정치인이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 지위가 낮은 사람, 장애인 또는 노숙인과 같은 사회적 약자에게 말하는 태도를 보면 단순한 개인의 취향이 아니라 그가 정치를 통해 실현하고 싶은 사회를 상상할 수 있다.

 또한, 대중을 대상으로 강연하는 이들도 반말을 자주 사용한다. 그중 성직자와 유명 강사들은 강연 도중에 반말을 사용함으로써 다양한 효과를 얻는다. 일단 청중과의 거리감을 좁힘으로써 친근감을 느끼게 할 수 있다. 친근감을 표시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반말을 할 수 있다는 말은 나이나 지위, 혹은 권력의 우월적 위치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대중이 갖는 순종적 자세를 역이용하는 것이다. 이럴 경우 청중은 반말을 기분 나쁘게 듣기보다는 강연자를 자신보다 뛰어나고 훌륭한 존재로 인정한다. 그러한 관계는 이미 강의를 듣는 강사와 청중의 관계에서 일정하게 형성되는데, 반말의 사용은 그 관계를 더욱 확실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인간사회는 과학기술뿐만 아니라 철학이나 종교, 사상 등에 있어서 진보적인 방향을 추구한다. 하지만 그러한 진보가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양한 일상의 구석구석에서 치열한 투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삶에서 느끼는 민감성의 문제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민감한 감수성을 토대로 좀 더 나은 관계, 더 나은 공동체를 이루어가야 할 것이다. 반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통용되는 사회가 아니라 타인의 인격을 존중하는 방식으로서 대화를 강조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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