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 없는 완벽함보다는 개성적인 미완이 낫다

왜 예뻐야 할까. Mnet <언프리티 랩스타>는 아마도 이 질문에서 시작해 프로그램을 기획했는지도 모르겠다. 예쁘고 완벽한 모습은 저리 집어치우고, 대신 센 언니들이 나와 거침없이 속내를 털어낸다. 거친 표현은 물론이고 욕도 서슴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이 전혀 예쁘다고는 볼 수 없는 언니들이 그토록 멋있게 느껴지는 건. 도대체 무엇이 이런 느낌을 만들어내는 걸까. 거기에는 어떤 문화적 관점이 들어있는 걸까.

완벽하고 예뻐야 주목받는다는 건 실로 옛날 얘기가 됐다. 지금은 완벽하지 않아도, 아니 오히려 완벽하지 않아야 주목받는 시대처럼 보인다.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라. 완벽한 외모를 갖추고 가창력을 구사하는 참가자는 바로 그 완벽함 때문에 식상하게 받아들여진다. 심지어는 개성이 없다는 의미로까지 얘기되곤 한다.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하고 노래 부르던 시절은 지나갔다. 이제 TV는 특별한 존재들만의 공간이란 인식이 없어진 지 오래다.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이 보여주듯 일반인들이 계속 방송으로 들어와 스타가 되기도 하는 와중에, 스타들의 행보는 정반대로 움직인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더 이상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일반인과 똑같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제 신비주의 따위는 족쇄가 됐다. 스타들은 일반인과 똑같은 눈높이로 내려와야 하는 방송 생태계 속에서 어떻게 하면 자신을 내려놓을까를 놓고 고심 중이다. 이 시대에 완벽하다는 건 매력적이지 않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완벽하다는 건 그 대상을 나와는 다른 존재로 인식시키기 때문이다. 이제 대중들은 선망을 원하지 않는다. 대신 공감하기를 원한다. 선망이 신비주의 시대를 낳은 심리적 요인이라면, 공감은 다양성의 시대를 낳은 사회적 배경이다.

오히려 개성은 부족함에서 나오는 법이다. 따라서 한두 가지 정도의 단점을 드러내고 그것을 통해 자신도 일반인과 비슷하다고 어필하는 스타들은 그 단점이 오히려 개성으로 부각되곤 한다. 이처럼 완벽함을 피하고 오히려 부족함조차 개성으로 받아들이는 새로운 흐름은 다양성의 시대를 열고 있다. 완벽히 준비된 존재로서의 아이돌보다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았지만, 그 자체로 충분한 오디션 스타들이 더 주목받는 건 그래서다.

누구나 영상을 만들고 배포할 수 있는 미디어의 일상화 속에서 미와 매력의 절대적 기준은 별다른 의미가 없어졌다. 일반인은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영상의 주인을 자처하며 방송 역시 일상이 됐다. 그 안에서 완벽한 얼굴과 모습은 설 자리를 점점 잃어간다. 조금은 부족하고 단점이 있는 자신의 모습. 즉 자연스러운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을 때 더욱 매력적인 존재가 되는 시대가 도래했다.

저작권자 © 동덕여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