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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서울시 청년 우울 수준 (우)고립·은둔 청년 우울 수준

 

  2000년대 초반 대한민국에서 ‘니트(NEET)족’은 뜨거운 감자였다. ‘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의 약자인 ‘NEET’는 학업, 직업 훈련, 구직 그 어디에도 참여하지 않는 청년을 뜻한다. 세상은 이들의 등장을 반기지 않았다. ‘게으르다’, ‘부모에게 부담을 준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 니트족을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편파적이다. 그들이 보내는 구조신호는 우리 사회가 감춰야 할 치부에 머물렀다. 그 결과 대한민국 청년 니트족은 2011년, 약 100만 명을 넘어서게 된다.


  이에 뒤이어 새롭게 등장한 개념이 있다. 바로 ‘은둔형 외톨이’, 흔히 말하는 ‘히키코모리’다. 히키코모리는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집안에만 틀어박혀 사는 사람들 혹은 그런 현상을 일컫는 단어로, ‘틀어박히다’라는 뜻의 일본어 ‘ひきこもる(히키코모루)’에서 유래됐다. 요즘은 집 밖으로 자주 나가지 않는 사람을 재치 있게 지칭할 때 쓰이기도 하지만, 숨겨진 의미를 살펴보면 이는 더 이상 농담처럼 소비될 단어가 아니다.

 

고립·은둔 청년 실태조사가 던지는 시사점은
  지난해 서울특별시는 만 19~39세 청년이 거주하는 5,000여 가구를 대상으로 고립·은둔 청년 실태조사를 시행했다. 이는 전국 최초의 고립 청년 실태조사다. 고립 단계는 총 두 가지로 분류됐다. (△고립=정서적 또는 물리적 고립상태에 놓여 최소 6개월 이상 고립상태를 유지하는 경우 △은둔=최근 한 달 내 직업·구직 활동을 하지 않고 최소 6개월 이상 외출 없이 집에서만 머무는 경우) 조사 결과, 고립·은둔 상태에 있는 서울시 청년은 약 4.5%, 12만 9천여 명에 달했다.


  물론 이를 공식적인 통계로 인정하기엔 무리가 있다. 특정 수치를 공식화하기 위해선 통계청의 심사를 거쳐 표본 선정 과정과 통계 기준을 명확히 해야 하는데, 해당 실태조사는 이를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표본 규모가 지나치게 작거나 검증된 통계작성 기법을 사용하지 않아 신뢰성을 확보할 수 없는 경우에도 승인이 반려된다. 그러나 서울시가 히키코모리 문제를 예외적 경우가 아닌 하나의 사회 문제로 인식했다는 점에서는 꽤나 주목할 만하다.


‘비정상의 정상화’라는 오만한 착각
  히키코모리 문제에 첫걸음을 내딛는 시점에서, 대한민국은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최근 정부는 고용 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한 만 15세 이상 34세 이하 청년들에게 월 50만 원씩 6번, 총 300만 원을 지원하겠다는 내용의 ‘청년 도약준비금’을 발표했다. 이는 일종의 현금성 지원사업으로, 은둔 청년의 경제적 자립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문제가 빠져있다. 청년의 ‘취업 여부’를 정책 성공의 척도로 삼은 것이다. 본교 사회복지학전공 남기철 교수는 “은둔, 고립이라는 그 자체보다 당사자의 ‘고통’에 초점을 둬야 한다”며 사회적 관계의 단절, 외출하지 않는 행위 자체를 문제 삼는 건 적절치 않다는 견해를 표했다.


  또한 ‘물질적’ 보상만이 답은 아니다. 본질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선 심리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앞서 언급한 조사에서 고립·은둔 청년 10명 중 8명은 가벼운 수준 이상의 우울을 겪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중 △중증 수준의 우울=39.3% △심한 우울=18.3%로 서울시 청년 평균인 23%, 4.5%보다 각각 약 1.5배, 4배 높은 수치다. 또, “낙심하거나 우울할 때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있냐”는 질문에 절반 이상(56%)이 ‘없다’고 응답했다. 겪고 있는 고통을 토로할 공간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돌봄의 공백 또한 존재한다. 이전까지 한국의 사회 돌봄 시스템은 주로 영유아, 노인 또는 장애인을 대상으로 이뤄졌다. 상대적으로 ‘무탈한’ 청년 1인 가구를 돌봄 대상에서 배제한 것이다. 남 교수는 이를 돌봄의 사각지대라고 지적했다. 청년 돌봄을 예외로 취급해서는 안 되며, 사람마다 도움과 지원이 필요한 시기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제는 돌봄의 경계를 재검토할 시점”이라고 덧붙였다. 


  일각에서는 은둔 청년들의 ‘제3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움직임도 포착되고 있다. 서울시 강북구에 위치한 ‘K2 인터내셔널 코리아 셰어하우스’는 히키코모리들의 생활방식, 소통 능력 재생을 돕겠다는 취지로 출발해 지금까지 활발히 운영되고 있다. 자체적인 커뮤니티를 형성할 수 있는 공간의 효과가 입증된 것이다. 그러나 현재 대부분의 은둔 청년 자조 모임은 민간 사업의 주도하에 이뤄지는 실정이다. 제3의 공간을 공공 사업화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유의 사항이 존재한다. 해당 공간을 국가가 일괄적으로 통제하거나 관여할 경우 자칫 시설화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남 교수는 “지자체의 역할은 공공 주택 마련을 비롯한 공간적·재정적 지원에 한정하고, 청년 집단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운영하게끔 유도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지난 1월, 서울시는 3월 중 고립·은둔 청년 종합 지원계획을 발표하겠다고 예고한 바 있다. 주요 내용은 △고립·은둔 청년 사업과 청년 마음 건강 지원사업 통합 추진 △마음 건강 비전센터(가칭) 설립 △대학 전문병원과의 업무협약 등으로, 구체적인 운영 방식은 미지수다. 논점은 해당 지원을 청년의 사회복귀를 위한 단순 ‘수단’으로 도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청년다운’ 청년은 어떤 모습인가요
  2023년 현재까지도 은둔형 외톨이에 관한 법률적 기반은 마련되지 않은 상태다. 히키코모리에 대한 정확한 규정이 부재한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인 문제는 ‘사회적 낙인’에 있다. 히키코모리를 떠올렸을 때 흔히 연상되는 이미지는 흐트러진 방, 게임 중독, 어둡고 위축된 모습이다. 이것이 매체가 묘사하는 은둔형 외톨이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최근 tvN에서 방영된 드라마 <일타스캔들>의 등장인물인 ‘희재’는 입시 실패로 주로 집 안에만 머문다. 그에게 세상은 냉정하기만 하다. 고양이 학대범으로 의심받기에 모자라, 추후 사람을 살인했다는 오명을 쓰는 일련의 과정에서 희재의 가족조차 그의 억울함을 믿어주지 않는다. 그가 ‘실패’한 은둔 청년이기 때문이다. 


  일본 열도를 뒤집은 아베 전 총리 피격 사건의 피의자 야마가미 데쓰야(山上徹也·42)는 본인의 범행이 “집안을 파산하게 한 종교 단체를 향한 보복”이라고 진술했다. 하지만 일본 언론은 그가 명문고 출신의 무직 히키코모리였다는 점에 주목했다. 2019년에는 전직 농림수산성 차관이 40대 히키코모리 아들을 흉기로 찔러 살해한 사건도 있었다. “아들이 근처 초등학교가 시끄럽다고 하자, 아이들을 해칠까 두려워져 범행을 저질렀다”는 가해자의 진술에 일부 네티즌들은 ‘오죽했으면 그랬을까’라는 반응을 보였다. 은둔형 외톨이를 향해 암묵적으로 존재해온 편견과 낙인은 지울 수 없는 주홍글씨가 됐다. 은둔생활이 범죄를 저지를 명분이 되기도, 피해자가 될 명분이 되기도 하는 사회 속에서 히키코모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전문가는 ‘청년’이라는 단어가 지닌 이미지를 재규정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남 교수는 “사회에서는 청년을 100:1의 경쟁을 뚫어내는 ‘불굴의 젊은이’ 즈음으로 보고 있다”며, “그 아래 감춰진 나머지 99명의 ‘보통 청년들’을 눈여겨봐야 한다”고 말했다. 청년이 상징하는 밝음과 열정이 오히려 청년을 고정된 틀 안에 가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K-서바이벌 열풍’과도 맞닿아있다. 서바이벌 혁명을 일으켰던 Mnet의 <프로듀스 101> 시리즈와 최근 방영되는 <보이즈 플래닛>은 상위 10%의 청년만이 주목받는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밑바닥에서 시작한 참가자가 경쟁자들을 제치고 상위권에 등극하는 서사에 시청자들은 열광한다. 반면 탈락자의 공허와 좌절은 가차 없이 편집된다. 브라운관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 청춘 드라마의 주인공은 어떠한 고난에도 사랑과 성공을 쟁취하고야 만다. 그것이 이상적인 ‘청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현 2030세대는 유례없는 무한 경쟁 속에 던져졌다. 단 한 번의 실패도 용납되지 않는 대한민국 청년에게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명언이 될 수 없다. 청춘은 아파서는 안 된다. 종이에 베인 상처가 때때로 오래가듯, 성장통의 크기는 제각각이다. 이제 문밖에 서서 깊숙이 숨어버린 외톨이들을 억지로 꺼내려 하기보다는, 함께 앉아 저 너머를 바라보는 사회가 되는 건 어떨까.
 

이지은 기자 jieuny924@naver.com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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